グッドニュース誌(韓国語)
月刊「グッドニュース誌」は救いの福音と恵みの証を伝え、多くの人々をイエス・キリストの世界へ導いています。

[설교]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임민철(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投稿者
goodnews2
投稿日
2020-12-22 13:29
閲覧数
625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했던 갈라디아 지방
갈라디아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 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쫓겨 복음을 더 이상 전하지 못하고 이고니온으로 옮겨야 했습니다(행 13:45, 50).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급히 루스드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행 14:5~6). 급기야 루스드라에서는 안디옥이고니온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성밖에 버려지기까지 했습니다(행 14:19). 
이처럼 갈라디아 지방은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했고, 그곳에 있었던 교회들에서도 구원받은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바울은 이런 역할을 하는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모든 사람이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폐기하고 멋대로 살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유를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기회로 이용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구원받은 성도의 진정한 자유는, 형제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종이 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
이제 우리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해주려고 했던 하나님의 뜻과 바울의 믿음을 보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교회 안에 참된 복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길 바라며, 갈라디아서를 한 부분씩 세심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1~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서, 가장 먼저 자신이 사도 된 것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에게서 난 것이 있고,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성경은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람에게서 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람과 결부시켜서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사탄에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람에게서 나거나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이야기한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을 우리에게 소개하려고 한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은 어떤 사실들을 왜 기록했는지 우리에게 정확히 이야기해 줍니다. 성경은 우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람이 어떤 능력이 있는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라고 생각하고, 혹은 ‘내가 왜 그렇게 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은혜를 입기 바라십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연관된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사람과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과 에서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성경은 이삭의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실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0~16)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이야기한 것과 꼭 같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일은 사람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말씀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어떤 원함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들이 열심히 달음박질한 것도 아닐 때,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고 야곱을 세우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들은 하나님이 결국 내쫓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들, 그것들은 쫓겨나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들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하고 힘이 좋은 여자 하갈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반대로 이삭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죽은 것과 같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가 90세로,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진 여자였습니다. 사라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사라 자신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웃었습니다. ‘90세 된 여자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6~22)
 아브라함이 의를 얻었는데 어떤 의였습니까? 사람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였습니다. 그 의를 어떻게 얻었습니까? 
아브라함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가 90세 때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나 사라의 태가 생명을 낳을 수 없는, 죽은 것 같은 상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서는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내 몸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주신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믿은 것을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따라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고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서 난 것을 믿으려고 하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버림을 받은 자들이 있고, 은혜를 입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이 버림을 받았습니까?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는, 그 시대에 정말 무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그들과 다른 것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세리에 비하면 윤리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느냐,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냐,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고 마음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느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이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느냐?’입니다.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사울과 아나니아가 알고 있는 사울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무엇을 해서 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세우신 것이 당신의 뜻임을 아나니아에게 정확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0~16)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그는 사울 만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가 듣고 아는 사울이 있어서,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지식이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배척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가 알고 있는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성도를 해롭게 하는 사람,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 생각은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 말미암은 것,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사울을 배척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길을 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과 관계된 것이 아님을 정확히 나타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바울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한 사실 한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혹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거나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그것은 쫓겨나야 할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힘있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