グッドニュース誌(韓国語)
月刊「グッドニュース誌」は救いの福音と恵みの証を伝え、多くの人々をイエス・キリストの世界へ導いています。

[설교]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임민철(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投稿者
goodnews2
投稿日
2021-05-1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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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1~10절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유대교의 엄격한 규례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배웠고, 율법대로 행해서 의를 이루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은 결국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으나, ‘예수님이 부활했으며, 그분이 메시야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다’는 가르침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은 사울을 몹시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분명히 죽었어.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어.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는 자들은 악한 무리임이 틀림없어. 그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해.’ 이 마음으로 사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감옥에 갇히게 하고, 죽임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뿐 아니라 다메섹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려고 대제사장에게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사울은 그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면서 ‘예수는 죽었어!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어! 예수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자들도 예수처럼 반드시 없어져야 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어긋난 확신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잘못들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을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예수님 앞에 굴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의 변화에 큰 타격을 받았고, 그런 사울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의 도움으로 다메섹에서 도망해 아라비아로 가서 머물러 있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머물렀습니다.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스데반이 죽은 뒤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전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 사람에게도 전해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 그들을 인도하게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계속 일어나자 바나바는 고향 다소에 머물러 있던 사울을 찾아가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교회를 인도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그 후로도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갈 2:1)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행 15:1)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선민選民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주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지 않고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할례를 받은 유대인은 구원받는 데 문제가 없지만, 이방인은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선택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갈 2:2) 사도 바울은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복음과 다르기에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갈 2:3)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죄인이요 멸망을 당할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9~12)
성경은 인간이 다 죄 아래 있어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끝없이 자신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끌려 삽니다.
창세기 40장에서, 애굽 왕 바로의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서 꿈을 꾸고, 요셉이 꿈을 해석한 대로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꿈에, 자기 앞에 있는 포도나무에 달린 익은 포도송이의 즙을 짜서 잔에 담아 바로에게 드렸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꿈에, 자기 머리에 흰 떡 세 광주리가 있고 윗 광주리에는 바로를 위해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었습니다.
포도즙과 흰 떡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 찢기신 몸을 나타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예수님의 피만 의지해 왕에게 나아가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떡 굽는 관원장은 예수님의 찢기신 몸만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비한 많은 것을 그 위에 얹어서 갔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떡 굽는 관원장의 수고와 노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보기에는 좋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인간이 행한 모든 것이 더럽고 악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나가니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떡 굽는 관원장처럼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자신이 행한 것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여기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서, 예수님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도리어 그 일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들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은 곧 죄입니다. 그들이 한 일이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선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모든 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마치 자신이 선한 것처럼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 너무 원하지만 행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욱 다듬고 마음을 다 쏟아서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한 것이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인이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죄가 있기에 결국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시며, 떠나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이 퍼져 있어서, 바울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사람을 의지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기 노력과 수고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려고 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가난했던 때라 교회에 가면 먹을 것을 주어 감사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배울수록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어,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하면서 말씀과 가까워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제가 말씀을 지키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마음이 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빌며 회개하는 삶이 신앙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제 마음을 사로잡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저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제가 말씀대로 살지 못해 회개하면서, 마음에서 끝없이 되뇌는 말이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복을 받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율법사의 모습이 저와 똑같았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자기가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율법사처럼 저 또한 그랬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마음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였습니다. 늘 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이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살면 살지만, 살지 못하면 죽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살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삽니까? 그런데도 저는 ‘그래,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영락없는 율법사의 마음이었습니다.
율법사가 “나는 못 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이 그를 구원해 주실 텐데,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했습니다. 악한 자기 모습을 숨기고 말씀만 하면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율법사처럼, 제가 그렇게 살아온 것이 보였습니다.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않고, “제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했다면 예수님이 죄 속에 있는 율법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가리고 나오니까,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행위로, 즉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서는 의롭다는 판단을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죄인이라고 판단하시고 멸망을 당하게 하십니다.

 

복음의 진리가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제하기 위해 가면서,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3~5)
바울은 복음의 진리 외에는 교회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자신에게 맡기셨음을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냈습니다. 이 시대에도 은혜의 복음 외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것처럼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르침을 경계하고, 참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